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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서 사국시대로

독사수필 2006. 8. 21. 09:41
 

 

삼국시대에서 사국시대로


김태식


삼국시대 관념의 기원


2004년에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에 의해 고구려사의 정체성이 국제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이후, ‘삼국시대’라는 용어처럼 고마운 것은 없었다. 적어도 고대시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는 한국사에 포괄된다는 천 년이 넘는 오랜 인식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사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점에 대하여 그러한 전통은 외국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통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삼국에 속하지 않는 ‘임나(가야)’가 있고 이는 일본 영토에 속한다는 주장을 접하면, 그 ‘삼국시대’라는 용어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보통 한국 고대사를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라는 이름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우리나라의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지탱하고 있었던 시기는 562년부터 660년까지의 98년간이었으므로, 삼국시대를 고집하면 시간적으로 그 이전의 천 년 이상을 버리게 된다. 이는 통일신라시대라고 표현하는 순간에 대동강 이북에서 만주에 이르는 한국 고대의 영토에 대한 기억을 상실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과연 이것을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삼국시대라는 관념은 고려시대 중기의 정치가 겸 역사가인 김부식(金富軾)이 1145년에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은 그것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그러므로 그 역사서의 이름만 보아도, 고대의 역사를 ‘삼국’으로 정리하는 것은 일단 고려시대 사람들의 인식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인의 그 인식도 실은 신라인의 것을 계승한 것에 불과하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건국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것은 최후 승자인 신라인의 주관적인 역사인식이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이후, 삼한과 삼국을 동일시하고 신라가 삼한을 통일했다고 자랑했다. 692년에 당나라가 신라 태종무열왕의 묘호를 바꿀 것을 요구하자 신라가 이를 거절하면서 당에 보낸 국서(國書)를 보면 신라인의 그러한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신라 말의 최치원(崔致遠)은 마한이 고구려가 되고, 진한이 신라로 되고 변한이 백제로 되었다고 보았는데,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최치원의 견해가 옳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인의 역사인식과 그를 계승한 고려인의 인식이 현재의 관점에서 보아도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우선 삼한과 삼국을 동일시하는 것도 문제가 되며, 또한 우리 역사의 터전에서 명멸했던 고조선, 부여, 가야, 발해 등을 무시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가야만 보더라도 동쪽으로는 경상남북도의 낙동강 유역부터 서쪽으로 소백산맥을 넘어 전라남북도의 동부 지역에 이르는 옛 가야 주민의 역사를 무시하게 된다. 이는 결국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그르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 전체의 경험을 시간적·공간적으로 축소시키는 결과가 된다.


실학자의 확장된 역사인식


잘못되고 축소된 역사인식은 민족 전체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장애가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려 후기에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큰 시련을 겪은 이후 당시의 사상계를 이끌던 일연(一然)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저술하여 역사인식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는 사서의 이름을 ‘삼국의 남은 일들’이라고 했으나, 그 속의 「기이(紀異)」 편은 고조선(왕검조선), 위만조선, 마한, 2부, 72국, 낙랑국, 북대방, 남대방, 말갈=발해, 이서국, 5가야, 북부여, 동부여, 고구려, 변한=백제, 진한 등을 망라하고 장문의 『가락국기(駕洛國記)』를 거의 그대로 게재했으며, 「왕력(王曆)」 편에서는 우리의 역사를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네 나라의 연표로 정리했다.


이렇게 확대된 역사인식의 토대 위에서 우리 민족은 몽고 간섭기를 극복하고 조선을 개국할 수 있었다. 그 후 조선 초기의 권근(權近)은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 최치원의 그릇된 삼한 인식을 처음으로 지적했으나, 변한은 백제가 되고 마한이 고구려가 되었다고 하여 삼한과 삼국을 동일시하는 큰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한백겸(韓百謙)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서 삼국시대 논리의 허점을 발견해냈다. 즉, 우리 동방은 옛날부터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서, 북쪽에서는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사군(四郡)―이부(二府)―고구려로 전개되었고, 남쪽에서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각각 백제, 신라, 가락으로 계승되었다고 했다. 그는 지리 고증을 올바로 함으로써 그동안 잊고 있었던 가락국, 즉 가야의 존재를 밝히고, 결국은 한국 고대시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4국이 대등하게 병존했음을 논증했다.


한백겸의 이론은 그 후 많은 실학자의 지지를 얻으면서 확산되어 삼국만을 강조하는 인식을 수정해 나갔다. 이수광(李晬光)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우리 동방의 역사는 장구하여, 단군이 1048년, 기자에서 마한까지가 1071년, 백제가 678년, 고구려가 705년, 신라가 992년, 가락국이 491년, 고려가 475년이라고 정리했다. 이는 곧 우리나라의 역사를 ‘고조선―사국(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고려’로 정리하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다. 물론 그 후에 유득공(柳得恭)이 나와서 발해를 포괄해서 고대 후기를 남북국시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이 타당함은 물론이다.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한백겸의 설을 받아들이면서도 삼한정통론을 세워 예맥, 옥저, 가락, 가야 등은 소국의 반열로 편입시킨 한계성은 있으나, ‘한나라 건무 18년(서기 42)’ 조에서 “가락국 시조 김수로 원년인데, 이해 이후 대국(大國)이 셋이고 소국(小國)이 하나로 모두 네 나라이다”라고 하여 사국시대를 인정했다. 정약용(丁若鏞)은 『강역고(疆域考)』에서 김해의 가락국이 가야제국의 총왕(總王)이었고, 가야는 해운을 잘 이용했으므로 같은 시대에 신라보다 훨씬 더 발달할 수 있었다고 하여, 근대적인 가야사 연구의 단서를 열었다.


가야사에 집중된, 잘못된 생각들


고려 후기 이후 수백 년에 걸쳐 선조들의 역사 경험이 넓어지고 연구가 심화되면서 신라 중심적인 협소한 역사인식도 수정되어왔다. 그래서 이제 대부분의 역사 개설서에서는 우리 역사의 연원을 고조선부터 찾고 있고, 고구려의 개국 연대를 신라보다 높이 올려보고 있으며, 발해가 개국한 698년 이후의 역사를 남북국시대라고 일컫고 있다. 그러나 가야사에 대해서만은 실학자들의 연구 동향을 계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다른 나라들의 통치를 받던 나라’, ‘약한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가야사에 대한 이러한 선입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실학자의 올바른 연구 경향이 왜곡된 것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우리에게 강요된 식민사학의 결과이다. 19세기 말부터 일제의 역사가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오는 신공황후(神功皇后) 삼한 정토 설화를 비롯한 여러 가지 왜곡된 사료들을 토대로 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했다. 즉,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고대 왜 왕권이 가야 지역을 정벌하여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어 남한을 경영했다는 것이다.


일제시기에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역사 교과서는 신공황후와 왜 왕권의 위대성을 선전할 뿐이었다. 우리가 국권을 되찾은 이후 교과서는 바뀌었으나 가야사 부분은 거의 삭제되거나 극도로 축소되었다. 이는 그동안의 일제의 선전에 물들어 스스로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열등감에 빠진 탓이다. 그래서 가야사에 대해서는 거의 거론하지 않으면서 50년이 넘게 흘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고고학이 발달하면서 가야의 풍부하고 수준 높은 유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이미 황국사관을 극복하는 차원에서 일본의 고대문명이 한반도 남부 가야 지역에서 건너간 기마민족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설이 나오고, 북한에서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야를 포함한 삼국의 주민이 일본 열도에 많은 소국을 건설하여 본국과 주종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설을 만들어냈다. 반면에 남한에서는 가야는 고대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이 아니라 백제의 지배를 200년간 받았다는 해석이 나왔다.


남들이 먼저 인정해주는 가야의 힘을 우리가 가장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십 년간 가야 지역에서는 수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그 유물들에서 고대 왜국의 지배라든가 백제의 지배, 또는 신라의 지배를 생각할 수 있는 근거 자료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유물들은 오히려 풍부한 부와 기술, 특히 제철 능력에서 나오는 무력과 토기문화의 선진적인 면모 속에서 오랜 기간에 걸치는 가야 문화의 독자적인 성격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이제 가야사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바꿀 때가 되었다.


사국시대의 필요성


문헌 기록에 가야는 서기 42년에 건국하여 562년에 멸망했다고 나오고 있지만, 실제로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2세기 말 내지 1세기 초에 한반도 서북 지역으로부터 철기와 회색 토기를 기반으로 하는 발달된 문화가 영남 지역으로 들어와 성립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신라와 마찬가지로 2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소국이 형성되고, 3세기에 들어와 김해를 중심으로 완만한 연맹체를 조성했으며, 3세기 후반 이후로는 김해의 가야국(구야국)이 좀더 강한 연맹체의 중심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는 한반도 서북부에 들어와 있던 중국 군현과의 대항 과정에서 보다 빨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그리하여 4세기 초에 고구려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고 백제와 국경을 접한 이후로는 서로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4세기 중후반에는 백제가 우세를 점했고, 4세기 말 이후로는 고구려가 대세를 주도했다. 그 시기에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고, 가야는 백제와 연결하여 왜와의 중개 교역을 이루었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쟁패가 그에 연결된 세력인 신라와 가야에도 영향을 미쳐,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전기 가야연맹이 해체되고 5세기 후반에 고령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후기 가야연맹이 다시 부흥했다.


당시의 백제, 신라, 가야는 힘을 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면서도 서로 경쟁했으나, 가야는 백제나 신라에 비하여 중앙집권화가 상대적으로 늦어졌으므로, 신라와 백제가 경쟁적으로 이를 흡수하려고 했다. 그런 와중에 신라는 532년에 김해의 금관국(남가야국)을 병합하고 나서 비로소 약소국에서 벗어났고, 562년에 고령의 대가야국을 병합한 후로는 당당한 삼국의 일원으로 고구려 및 백제와 겨룰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 고대 시기의 대부분은 고구려와 백제의 2강과 신라와 가야의 2약이 서로 뒤엉켜 세력 균형을 이루며 전개되었다.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의 관념은 한국 고대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관건이며, 임나일본부설의 망령을 당당하게 물리칠 수 있는 방안이다. 게다가 5세기 초에 전기 가야가 해체될 때에는 수많은 이주민이 일본 열도로 건너가 제철 기술과 단단한 도질 토기인 스에키(須惠器) 제작 기술을 전해주기도 했는데, 일본의 고대 문명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가야는 비록 완성되지 못하고 멸망한 아쉬운 문명이지만, 한국 고대사의 자랑이며 신라가 훗날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한국 고대사는 고조선부터 후삼국까지를 대상으로 하나, 이를 어떻게 세분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남북국시대’를 제외하고 본다면, 대략 4세기부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668년까지를 ‘삼국시대’라고 하여 이것을 한국 고대사 범주의 기본으로 삼고, 그 앞의 시기는 고고학적 관점으로 ‘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 등으로 지칭하기도 하며, 혹은 문헌사적 관점으로 서력기원전 2세기까지를 ‘고조선시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를 ‘삼국시대 전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흔히 ‘삼국시대’라 불리는 기원전 1세기부터 668년까지의 시기 중 600여 년 동안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이 있었고, 가야를 제외한 삼국만 존재했던 시기는 98년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한국 고대사의 인식을 확대하고 조선 후기 실학 이래의 학문적 주체성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이제 ‘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지양하고 ‘사국시대’로 수정해야 한다.


혹자는 이 시기를 부여를 포함해 ‘오국시대’로 불러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부여는 285년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에 의하여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346년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백제’로 표현된 세력(고구려 또는 물길)의 공격을 받고 서쪽으로 천도했다가, 선비족 모용황(慕容皝) 군대의 침략을 받아 국왕 이하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간 후 거의 몰락했다.


그 이후에도 부여는 41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부여 정벌 등 몇 차례 사서에 보이나, 실질적으로는 연나라나 고구려의 위성국의 지위에 머물다가 494년에 그 왕족이 고구려에 투항했다. 그러므로 오국시대 대부분의 시기는 사국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 실학 전통에서도 부여를 포함한 오국시대의 논리가 거의 이어지지 않았고, 전반적인 연구도 너무 부족하다는 점에서, 아직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한다.


<역사용어 바로쓰기>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