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용어 바로쓰기

일제식민지시대 역사용어에 관한 숨은 진실

독사수필 2006. 8. 18. 10:39
   한줄기의 동일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 각 당사자의 입장에 따라 역사를 기억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일본이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일상적인 역사용어에는 서구나 일본이 우리를 타자화하고 대상화하여 일방적으로 명명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 말이 의식을 구속하고 제약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말을 바로 쓰고 이름을 바로 붙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역사용어 재검토라는 작업은 곧 한국 사회의 ‘근대사회 만들기’ 과정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용어들이 어찌 지금 소개하는 것들 뿐이랴!


여기서는 기존 역사용어를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글에서부터 여러 용어들이 혼용될 수밖에 없는 경우, 그리고 논란들을 소개하는 정도까지 다양한 수위와 방식의 글들이 있다. 사실 다양한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이름 붙여질 수 있는 현상을 단 하나의 용어만으로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역사용어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와 토론을 이끌어내는 데 하나의 계기가 되어 우리 역사 바로잡기의 시작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해방둥이’는 있는데 ‘광복둥이’는 없다? - 해방과 광복


  일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1주년이 되던 1946년 8월 15일, 남과 북에서는 각각 ‘해방절’ 기념식을 가졌다. 심지어 1948년 8월 15일 “해방절”에 “해방 제3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고 보도한 기사도 있다. 이처럼 남북한에 각각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8월 15일은 ‘해방’의 의미로 다가왔다.


  대한민국에서 해방절이 ‘광복절’로 바뀐 것은 1949년 10월 정부에서 4대 국경일을 제정한 때부터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해방절을 ‘민족해방기념일’로 이름을 바꾸어 기념하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경우는 좀 다른 점이 있다.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대한민국의 독립에 관한 국가의 공식 기념명칭은 ‘광복’이었지만 학교교육 과정에서는 1970년대까지도 ‘해방’이란 용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는 북한이 주체사관에 입각해 조선사를 전면적으로 재해석하던 때였고, 대한민국도 ‘주체적 민족사관’의 확립이란 이름 아래 교육과정을 전면 개편하고 한국사를 새롭게 체계화하던 때였다. 그리고 남북한 사이에 정통성 경쟁이 격화되면서 여기에 학교교육도 휩쓸려 들어갔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교과서에서 주로 ‘해방’이란 용어가 사용된 것은 일제하 민족운동사에 대해 계통적이고 세밀하게 다듬는 작업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교과서에서 해방이란 말 대신에 광복이란 용어가 완전히 정착한 것은 1982년 제4차 교육과정 때부터였다. 광복이란 용어가 확정적으로 쓰이게 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남북한의 체제 우월성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남북한 정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민족사적 정통성’이 있는가를 증명하던 치열한 체제경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광복과 해방이란 용어가 혼용되고 있지만, 정치적 의미와 무관하게 두 단어를 뜻풀이함으로써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광복은 ‘빛을 되찾은 것’이란 뜻으로, 잃었던 주권을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해방은 ‘속박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이란 뜻으로, 우리를 속박한 일본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혹자는 광복이란 말에 능동적이고 정신사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뜻풀이를 하는 데 비해, 해방이란 말은 수동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용어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의미든 사전적인 뜻에 충실히 한다면 1945년 8월 15일은 해방의 날이며, 1948년 8월 15일은 광복의 날이다. 그런데 1948년 8월에 세워진 대한민국은, 잃어버린 주권국인 대한제국을 다시 찾아 세운 것이 아니라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로 재출범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전적 의미를 충실히 따라가다 보면 8월 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기에는 불완전한 측면도 있다.


  역사용어로서의 불완전함은 해방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8월 15일 직후부터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에게 항복을 접수한 직후부터 한반도는 점령지로 바뀌었다. 분단이 우리의 주체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었고,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분단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해방과 광복 그 어떤 용어도 완전한 역사용어는 아닌 것이다.


  광복과 해방이란 단어는 일본의 식민지시기에도 다양한 함의로 사용되었다. 대체로 반제국주의운동을 펼친 주역들은 민족주의 계열이나 사회주의 계열 모두 이 두 용어를 혼용했다. 다만 사회주의 계열의 조직들이 해방이란 단어를 사용한 경우가 더 많았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1945년 8월 이후 한반도의 사회적 공간을 설명할 때 ‘해방공간’이라는 말을 끌어들이지 ‘광복 공간’이라고 하는 경우는 없다. 1945년에 태어난 사람들을 ‘해방둥이’라고 말하지 ‘광복둥이’라고 하는 경우도 없다.


  8·15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해방이란 말이 옳은가, 광복이란 용어를 사용해야 맞는가라는 논쟁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사용자가 특정 시점에서 어떤 의미로, 어떤 쓰임새를 위해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이 두 용어를 재해석할 수 있다.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볼 때 불완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해방과 광복의 진정성도 현실을 바꿔가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대 다른 이름 - 왜정시대,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1910년부터 1945년까지 국망기(國亡期)를 지칭하는 용어는 왜정, 일제, 식민지 등의 단어에 강점기, 시대, 시기 등을 붙여 만들어져왔다. 왜정, 왜정시대, 일제강점기, 일제시대, 일제시기, 식민지시대, 식민지기, 일제식민지시대, 일제식민지시기 등이 그것이다.


  해방 직후 사람들은 치욕의 35년을 ‘왜정 치하’로 기억하며 치를 떨었다. ‘왜(倭)’란 전통적으로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을 가리키던 말이다. 국망이 현실화된 후, 해외 민족해방운동세력이 발간했던 신문과 잡지에서 침략자 일본을 ‘일본’이라 부른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상해 임시정부가 발행했던 신문이나 잡지에서 침략자 일본을 ‘일본’이라 부른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독립신문』이나 하와이 교포들이 발간했던 『국민보』에 등장하는 용어를 살펴보면 일본을 일관되게 ‘왜’로 지칭하고 있다. 이는 식민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정서, 바로 우월의식과 저항의식이 교차하는 지점에 ‘왜’라는 용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학문적으로도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역사학계를 주도하게 된 문헌고증사학계열의 학자들은 해방 이후 현대사는 물론 일제 치하의 역사=근대사 연구도 당대의 일이므로 객관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4·19와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계기로 민족주의적 기풍이 되살아나고 역사학계에서 식민사학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본격화되면서, 일제 치하 35년간의 역사가 학문 대상으로서 서서히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1960년대 말 한국사 시대구분 논쟁이 전개될 당시 역사학자 홍이섭은 ‘일제식민지시대’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1970년대 이후 반독재 민주화투쟁이 전개되면서 근현대사 학습 붐이 확산되면서 가장 많이 쓰인 용어도 ‘일제식민지시대’였다.


  1980년대에 들어와 본격화된 사회구성체론 논쟁에서는 일제 치하 35년을 어떤 사회로 성격을 규정할 것인가가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는데 이때 주로 쓰인 용어는 ‘식민지시대’였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부터는 민주화의 추세와 사회변혁이론의 득세 속에 인문·사회과학은 물론 예술 분야에서까지 ‘일제시대’라는 용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등장한 ‘식민지시대’나 ‘일제시대’ 혹은 ‘일제식민지시대’ 등의 용어는 근대사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역사학적인 검토 대상이 된다. 우선, 한국사 전반의 체계를 고려할 때,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역사학에서 ‘시대’가 갖는 의미는 일상적으로 쓰는 ‘시대’와는 자못 다르다.


  역사학에서 ‘시대’는 시간을 역사적으로 구분한 특정한 기간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사회의 전체를 표현하는 총체이기도 하다. 그 각각의 사회가 특정한 기간에 갖고 있는 개별적 특질을 세계사의 보편성과 함께 통일적으로 인식하고 그 발전 논리를 이론화하려는 노력의 소산이 바로 시대구분이다.

  

  예를 들어, 근대라는 ‘시대’적 특질을 갖춘 대한제국‘기’를 대한제국‘시대’라고 불러서는 곤란하다. 이때는 ‘시대’가 아닌 ‘시기’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일제(일본 제국주의)’에는 일본의 침략 본질에 대한 규정이 들어 있고, ‘식민지’는 당시 우리의 처지를 표현하고 있기는 하나, 둘 다 일본 침략의 강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성을 드러내면서 ‘국망’의 강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용어는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 ‘일제강점기’이다. 이후 ‘일제강점기’는 국사학계에서는 가장 친숙한 용어로 자리잡게 되었고, 근대사 관련 인문·예술 분야의 연구 성과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라는 용어는 민족국가사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정당한 표현이지만 사실 ‘왜정’이라는 국민 정서를 학문적으로 포장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탈민족적 성향을 가진 역사학자나 사회과학자들은 이 용어 대신 경향적으로 ‘일제시대’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동아시아적 시각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도 한반도의 경계를 넘어 동아시아 전반으로 시야를 확대할 때, 근대 동아시아사는 곧 일본 제국주의사라고 볼 수 있으므로, 일제시대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아직 우리 국민의 정서에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등의 과거사 문제를 외면하는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절은 ‘왜정’이다. 민족국가사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히 ‘일제강점기’이다. 한편 탈민족·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볼 때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성기, 즉 ‘일제시대’이다.


  이처럼 역사용어의 선정에는 학자의 역사적 안목이 그대로 투영된다. 민족국가로서의 주체성을 상실한 시기,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이 여러 갈래일 수밖에 없고, 서로 합일될 성질의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인륜적 피해자의 이름들 - ‘위안부’, 정신대, 공창, 성노예


  일본은 물론 우리 사회 한편에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은 언제 나온 것일까? 1970년대 일본에서는 중일전쟁 이래 아시아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 기간의 경험을 토대로 한 회고담이나 논픽션, 픽션이 집중적으로 출간되었다. 이때 『종군위안부』라는 책이 간행되는 등의 흐름 속에서 일본에서는 ‘종군위안부’라는 용어가 고정화되어갔다. 그러나 ‘종군’이란 수식어가 강제성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의 관련 단체들은 이 용어를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는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던 여성을 꽤 오랫동안 이 여성들을 ‘정신대(挺身隊)’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정신대라는 용어 또한 이름 그대로 ‘일본 국가(천황)를 위해 몸을 바치는 부대’란 의미이므로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정신대라는 용어가 조선에 나타나는 것은 1940년경부터이다. 이때 정신대는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용어로 보국단, 보국대라는 말과 혼용하여 일반명사로서 활용되었다. 하지만 1943년 이후부터 ‘여자정신근로령’이 논의되고 ‘여자정신근로대’가 조직되면서 ‘정신대’ 하면 ‘여자근로정신대’를 말하는 것이 되었다.


  원래 이 여자근로정신대는 전쟁으로 인해 남성노동력 부족을 느낀 일제가 여성들을 군수공장으로 동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여자근로정신대와 군 ‘위안부’의 구분이 아주 선명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일본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를 ‘정신대’로 생각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일제의 여성 동원을 고려 공녀처럼 본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여자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정신대란 용어는 혼란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군 ‘위안부’와 정신대, 여자근로정신대라는 용어는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러면 정작 일본군에 의해 반복적·조직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을 당시에는 어떻게 불렀을까? 이미 널리 알려졌듯이 ‘군 위안부’와 ‘위안부’라고 불렀고, ‘작부(酌婦)’, ‘창기(娼妓)’ 등 일본 공창제도에서 쓰이던 표현이나 일반 성매매 여성을 지칭하던 표현을 그대로 쓰기도 했다.


  이 문제는 1990년대 한국, 일본, 동아시아, 그 외의 세계로 파문이 확산되어가면서, 용어 역시 정치(精緻)화 과정을 거쳤다. 운동 초기에는 ‘정신대’라는 포괄적인 용어에서 시작했지만, 1990년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운동에 역사 연구자들이 결합하면서 시대상과 결부되어 있는 역사용어로서 일본군이 만든 제도하에서 반복적으로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을 군 ‘위안부’나 일본군 ‘위안부’로 쓰게 되었다.


  그런데 이 ‘위안부’라는 말은 당시 군이 붙인 이름으로, 집권자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용어이다. 정작 피해 여성들은 자신들이 무엇이라고 불리는지도 모르는 채 있었고, 피해자의 관점은 용어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따옴표를 써서 ‘위안부’라고 쓰는 것으로 주의를 기울여왔다.


  ‘위안부’라는 용어를 명실상부한 적확한 표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도 꾸준히 있었다. 한일 간의 심포지엄에서 전쟁 성노예, 성노예 등의 명칭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충분히 공유하지 못했다.


  그러나 ‘위안부’라는 표현 자체는 적절하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일제가 ‘위안부’라는 용어를 만들어가면서 제도화했던 당대의 특수한 분위기를 전달해준다는 점, 이미 많은 이들이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 생존 피해자들이 ‘군대 성노예’라는 표현을 섬뜩하게 여긴다는 점 등의 이유가 있어 한국의 관련 연구자나 활동가 사이에서는 아직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두 용어가 함께 쓰이고 있다.



좌파는 민족해방운동 우파는 독립운동?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은 모두 제국주의와 싸워 이민족 지배로부터 민족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운동을 가리킨다. 실제 사전적인 해석은 거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이 주는 어감의 차이는 꽤 커 보인다.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은 우익의 용어이며, 민족해방운동은 좌익의 용어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지만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라고 해서 다 사회주의자들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오해, 특히 이 말들을 각각 우익이나 좌익의 전유물로 여기는 것에 대한 오해를 풀어보자.


  우선 민족주의운동의 대표 격인 임시정부에서도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함께 사용했다. 그렇다고 독립과 민족해방운동이 같은 말이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두 말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실 독립운동, 사회운동, 해방운동, 계급운동처럼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는 것, 특히 정치사회적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조직해서 움직이는 것을 ‘운동’이라고 하게 된 것은 대체로 1910년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1890년대 말부터 1900년대까지 ‘운동’은 신체를 단련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을 의미했고, ‘운동회’가 크게 유행하면서 ‘운동’이라는 말도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독립’이란 말은 일본에서 먼저 번역되어 소개된 말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메이지시기의 일본 지식인들이 도입한 ‘independence(독립)’는 자유주의적 개인의 독자성과 국가의 문명화를 함께 의미했다. 따라서 국가의 완전한 독립이란 서구 국가들과 대등한 수준의 문명을 창출하는 것이며, 근대적 부국강병에 다름 아니었다.

 

  한편 이때까지 국가의 독립이 강조되기는 했지만, 국채보상이나 교육구국과 같은 일련의 활동을 독립운동으로 지칭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을 탈취당한 이후 ‘독립운동’은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 반대하는 국내외의 저항운동들을 ‘독립운동’으로 일컫게 된 것이다.


  ‘민족해방운동’이란 말은 독립운동보다는 좀 더 늦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민족해방’이라는 말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민족자결주의, 러시아혁명의 여파 속에서 확산되었고, 우리 운동가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3·1운동 이후 1920년대부터 급격히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용어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럼 이렇게 정작 가리키는 실체는 거의 동일하고 실제로 혼용되기도 했던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우선 ‘독립운동’은 국가의 주권회복, 나아가서는 다른 국가와 대등한 지위의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다. 이에 비해서 ‘민족해방운동’은 국가가 아니라 ‘민족’을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대체로 한 민족의 해방은 주권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되겠지만, 그것이 동일한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민족해방운동이 독립운동보다 우리 항일운동의 성격을 더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한편 세계사 속에서 우리의 항일운동이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하는 데에도 민족해방운동이 독립운동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다. 민족해방운동은 주권을 완전히 탈취당한 식민지뿐만 아니라 반식민지 민족들이 펼치는 반제국주의운동도 모두 포괄하기 때문이다.


  물론 독립운동이 잘못된 용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 상황에 따라서 어떤 대상을 표현하는 데는 독립운동이 더 적절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이유로, 우리 민족의 반제국주의운동을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로는 독립운동보다 민족해방운동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을사조약이 아니라 한일외교권위탁조약안이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일본 외무성에 위탁하고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 사무를 감리하기 위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조약안이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에 강요되었다. 일본에 의해 강요되었던 이 조약안은 그동안 을사조약, 을사5조약, 을사늑약, 한일협상조약, 제2차 한일협약, 한일신협약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왔고 ‘강제로 체결’되었다고 서술되어왔다.


  이렇게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공식 명칭, 즉 조약 원본의 제목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서울대 규장각)과 일본(외무성 사료관) 두 나라가 가지고 있는 이 조약안의 원본을 보면 첫 페이지 첫 줄이 빈칸으로 되어 있다. 이 조약안에 대해 일본 측은 ‘한일신협약’ 또는 ‘2차 한일협약’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일본은 왜 협약이라는 등급을 고집했을까? 협약(Agreement)은 정식조약(Treaty)과 협정(Convention)에 이어 세 번째 등급의 조약이다. 정식조약은 ① 주권자의 조약 체결 권한 위임, ② 체결 권한을 위임받은 전권대표의 조인, ③ 주권자의 비준이라는 절차를 거쳐 효력이 발생하는데 반해 협약은 양국 주무대신의 합의와 서명만으로도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일본은 이 점에 착안해서 1905년의 외교권 위탁 조약을 ‘협약’ 등급으로 처리하려 했다.


  왜냐하면 일본은 외교권 위탁의 경우 정식조약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주권자인 고종이 외교권을 빼앗기는 조약안을 순순히 승인하지는 않을 것이고 위임과 비준의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런 계산하에 조약안 처리에서 고종 황제를 배제하기 위해 주무대신의 합의와 서명만으로도 효력을 가질 수 있는 등급으로, 즉 정식조약에서 두 등급이나 아래 단계인 협약으로 고의적으로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주권국가의 외교권 위탁에 관한 조약을 주권자의 승인 절차 없이 체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1905년의 조약안은 협약 등급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1905년의 외교권 위탁에 관한 한일 조약안은 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권의 일부인 외교권은 주권자인 고종이 행사해야 한다. 고종이 대표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특명을 받은 전권대표가 황제를 대신하여 조약의 내용을 검토·수정·보완한 후 합의에 이르러 조인을 하고, 조인된 조약은 추후에 고종의 동의를 얻어 비준서를 교환한 후 공포(公布)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1905년 조약안의 경우 한국 측 대표라고 하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이 조약 체결의 권한을 위임받았다는 행정 기록이나 위임장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외부대신을 전권대표로 임명하라고 여러 차례 강요했지만 끝내 전권대표가 임명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조약 원본에도 한국 측 대표는 ‘특명전권대신(特命全權大臣)’이라는 표현이 빠진 채 ‘외부대신 박제순’이라고만 적혀 있다. 일본 측 대표인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주한일본공사에 대해서도 ‘특명전권대신’이라는 표현은 들어가 있지만 일본 천황으로부터 받았어야 할 위임장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를 통해 한일 두 나라의 대표자들은 조약 체결 권한을 위임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05년의 조약안에 대해 때로는 ‘강제로 체결되었다’라고 쓰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강제이긴 하지만 ‘대한제국 측이 도장을 찍었다, 즉 조인하였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이 도장을 찍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야시 주한일본공사는 1905년 11월 17일 아침 일찍부터 외부에 사람을 보내 도장을 가진 관리를 감시했다. 한국 정부 대신들이 좀처럼 도장을 찍으려 하지 않자 드디어 이토의 명령으로 일본인 관리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 일본공사관 한국어 통역관)와 누마노(沼野, 외부 보조원) 두 사람이 외부대신의 직인을 훔쳐낸 후 이토와 하야시 두 사람이 조약안에 외부대신의 직인을 찍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1905년의 조약안은 조인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일제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은 1907년 7월 16일 헤이그 사건 수습 방안(고종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는 방안)을 고종에게 올렸는데, 그 수습 방안의 첫째가 1905년 11월 17일의 한일신조약에 옥새를 찍어 이를 추인할 것이었다.

 

  외부대신의 직인을 훔쳐내 일본 측이 날인했지만 2년이 지난 시점에서 고종의 추인을 받아 조약 체결을 마무리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를 거부했고, 끝내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내쫓기고 말았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1907년 7월까지도 1905년의 조약안은 주권자인 고종이 비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05년의 조약안은 위임, 조인, 비준의 과정을 어느 것 하나도 거치지 않았다, 즉 체결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강제로 체결되었다’라는 직접적인 표현도 하지 말아야 하고, 그런 의미가 들어 있는 ‘늑약(勒約)’ 등의 표현도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1905년 조약안의 등급은 그 내용의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협약이 아니라 정식조약이라야 맞는다. 이 조약의 핵심 내용과 목적은 외교권 위탁 또는 외교감리이다. 한일 양국 사이에 논의되고 체결을 강요받아 조인된 것처럼 꾸며졌지만, 실제로는 조인되지 않은 그야말로 ‘안(案)’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 가지를 고려할 때 1905년 조약안은 잠정적으로 ‘외교권 위탁에 관한 한일조약안(한일외교권위탁조약안)’이나 ‘한일외교감리조약안’으로 부르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일합방이 아니라 한국병합이다


  일본의 한국 국권 탈취는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그 군사력을 배경으로 추진한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형식과 절차에 관한 국제관례를 무시했다. 「의정서」(1904. 2. 23), 「제1차 일한협약」(1904. 8. 22), 「신협약」(제2차 일한협약, 1905. 11. 17), 「한일협약」(1907. 7. 24) 등은 모두 국권에 관련된 조약이기 때문에 정식조약의 형식과 절차를 갖추었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전권위원 위임과 비준서 교환 등의 정식 절차를 밟으면 한국 측의 강한 반발로 성사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해 주무대신이 서명하는 약식 조약의 형식을 택했다. 


1910년 8월 18일 통감 데라우치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불러, 이번에도 전처럼 약식으로 처리해버릴 수 있지만 양국의 영원한 우호를 위해 모든 요건을 갖추고자 하니 적극 협조하라고 요구했다. 따라서 일본이 강요한 조약 가운데 이것만 유일하게 정식조약의 형식을 취했다. 순종 황제는 강압에 못 이겨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위임하는 위임장에는 서명 날인했지만 비준서에 해당하는 공포 조칙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비준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조약의 명칭으로 병합조약과 합방조약이 섞여 쓰이고 있다. 강제된 조약에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용어를 잘못 사용해서 사건의 성격을 잘못 알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일본 측이 공식적으로 취한 이 조약의 명칭은 「한국병합조약」이다. 준비위원회의 명칭이 그랬고, 해당 조약문의 전문(前文)에는 “양국 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한다”라고 쓰여 있다. 합방조약이란 용어는 당시 일본 정부가 기피하던 것이다. 합방은 대등한 나라로서의 일본과 한국이 하나로 합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909년 12월 일진회의 선언서가 취한 것이 바로 「연방적 합방」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바란 것은 대한제국을 일본제국에 흡수 통합하는 형태였다.


  그러면 조약을 강요당한 한국의 입장에서 취할 용어는 무엇인가? 일본이 정한 대로 이 조약을 ‘한국병합조약’이라고 한다면 병합의 사실 자체를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의 성립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 조약을 얘기해야 할 때 부를 수 있는 적절한 용어는 무엇일까?


  첫째로 그 강제성을 드러낸 표현으로 ‘병합늑약(倂合勒約)’이 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합병늑약’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 경우 두 나라 이름을 앞에 넣은 ‘한일합병늑약’이란 표현은 성립하지 않는다. ‘병합’ 또는 ‘합병’은 어디까지나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흡수통합하는 것이므로, 두 나라 이름을 병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일합병조약’이란 명칭 또한 성립하기 어렵다.


  다른 하나로는 이 조약을 강요당한 당사자였던 순종 황제가 사용한 “소위 인준(認准)과 양국(讓國)의 조칙”이란 표현이 주목된다. 순종 황제는 1926년 4월 26일 임종을 앞두고 자신이 이 조약을 승인하지 않은 사실을 밝히면서 해당 문건들에 대해 이 표현을 사용했다.

 

  ‘소위(이른바)’란 표현에는 조약문에 대한 인준을 자신이 하지 않았고 나라를 내주는 내용의 조칙도 자신이 승인하지 않은 것으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측이 말하는 것이란 점이 함축되어 있다. 이를 따르면 ‘소위 한국병합조약’이란 표현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소위 한일병합조약’은 성립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1910년 8월 22일에 강제로 체결된 한국병합에 관한 강제 조약에 대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은 ‘한국병합늑약’과 ‘이른바 한국병합조약’ 두 가지이다. 반면에 ‘한일합방조약’이나 ‘한일병합조약’은 사건의 본질에 부적절한 표현이므로 취할 것이 못 된다. 이런 변별이, 이 조약이 유효하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이 조약도 그 일방적 강제 및 순종 황제의 비준 거부로 인해 성립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친일’과 ‘협력’사이


  ‘친일(親日)’은 정말 익숙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친일’과 함께 사용되는 역사용어라면 ‘부일(附日)’을 들 수 있지만, 사실 부일과 친일은 의미의 차이가 거의 없다. 우리가 지금 흔히 사용하듯 ‘매국(賣國)’의 의미로 ‘친일’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이후, 특히 1907년 이후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 되어 가던 시점과 같다고 하겠다.


  이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고 민족해방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대다수 민중에게 친일파는 ‘매국노, 민족반역자, 저만 잘살려는 저질 인간’을 의미하게 되었다. 특히 국내외의 민족해방운동세력들에게 ‘친일파’란 일본 관리나 군인과 함께 처단해야 할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친일’ 행위가 과연 무엇이며 누가 친일파인가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였다. 1948년 제정되었던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제1장 ‘죄’의 항목에서 친일파를

1) 한일합방에 적극 협력하거나 한국이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에 조인하거나 모의한 자,

2)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하거나 지휘한 자,

3)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

4) 습작(襲爵)한 자, 중추원 간부, 칙임관 이상 관리, 밀정, 독립운동 방해 단체 간부, 군경찰 간부, 군수공업 경영자, 관공리 중 악질적 죄질이 현저한 자, 도(道)나 부(府)의 자문기관 또는 의결기관 의원 중 현저한 반민족 행위자,

5) 종교·사회·문화·경제 등 각 부문에서 반민족적 행위자,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 위해를 가한 자,

6) 고등관 3등급 이상, 훈 5등급 이상 관공리, 헌병, 경찰, 헌병보, 고등경찰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다시피 친일파에 대한 고발과 단죄를 담당한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권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그 이후 ‘친일’ 행적을 지닌 사람들이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1970년대까지 학문 영역에서 친일과 친일파에 대한 논의 또한 거의 전개되지 못했다. 친일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80년대에 다시 시작되었다.

 

  이미 이 당시는 ‘친일’을 죄와 처벌의 영역에서 다루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친일은 책임과 과거청산의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는 ‘민족’의 가치를 윤리적 기준으로 하여 친일파들의 반민족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 친일 담론의 중심이 되었다. 이는 해방 이후 한국에서 반민주적이고 종속적인 체제가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었던 것 자체가 일제 지배의 인적·제도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서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어느 정도 친일 문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여러 가지 사실이 밝혀지면서, 어디까지를 ‘친일’로 규정할지 논란이 재개되기 시작했다. 이런 친일의 정도와 죄질의 차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개인에게 물을 수 있는 책임의 한계는 무엇인가? 이런 의문들에 더하여 최근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과연 책임을 묻는 주체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친일파’를 단죄하고 그 책임을 묻는 주체는 ‘민족’이었다. 친일파 문제를 논할 때마다 흔히 제시되던 ‘민족정기론’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최근, 지금까지의 근대사 체계가 ‘민족’의 가치를 절대화하면서 식민지에 존재했던 다양한 삶의 양식을 지배와 저항의 흑백논리로 재단해왔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런 입장에서 ‘친일’ 대신 ‘협력’의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협력’이란 용어는 ‘주변부 이론’에서 나온 말이다. 주변부 이론은, 19세기 제국주의의 팽창을 제국주의 중심 국가들의 의도나 목표보다 식민지나 반식민지 상황에 놓여 있던 주변부 내부에서 현지 엘리트로 구성되는 협력의 체제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런 의미의 ‘협력’으로 파악할 경우, 행위자 개인의 책임보다는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협력의 구조나 체제가 중요시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구조의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역사적 과정 속에서 개인의 책임을 면제시켜 주지는 못한다. 책임을 묻는 주체로서 민족을 배제한다고 해도 여전히 책임과 윤리의 문제는 남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협력’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협력의 개념을 사용했다고 해서 ‘친일(파)’이 가진 ‘책임’의 문제의식을 완전히 배제했다고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친일의 문제의식 아래서 협력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러나 식민지에서 제국주의와 현지 엘리트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때, 책임과 과거청산의 측면을 강조하는 역사인식과, 일상과 구조를 강조하는 협력의 인식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지금 친일청산이 해방 이후 60년 만에 다시 제기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더욱 진지한 논의가 가능한 조건이 형성되었다.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보다 진지한 토론을 통해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구조와 책임, 국가와 개인의 문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역사용어 바로쓰기』(역사비평사) 중
   신주백, 김종인, 강정숙, 이기훈, 이상찬, 이태진의 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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